우리는 매일 문장을 읽고, 해석하며 살아간다. 그 해석이 때로는 어긋나기도 하고, 너무 감정적으로 치우칠 때도 있지만, 그런 서툰 해석조차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이 글은 ‘문장을 서툴게 해석했던 순간들’을 돌아보며, 그것이 결국 ‘나를 이해하는 과정’ 임을 짚어본다. 엉성한 해석도 삶의 일부였다, 감정이 문장을 흔들 때, 서툰 해석도 나의 결국 나의 삶이다에 대해 이야기한다.
1. 엉성한 해석도 삶의 일부였다
처음 어떤 문장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자주 엉성하고, 부정확하다. ‘이 말은 이런 뜻이겠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그 문장을 마주하면 전혀 다른 의미가 다가오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의 나는 그 문장의 겉껍질만 읽고 본질은 보지 못했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의 해석이 틀렸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때의 해석은 그 시절 나에게 꼭 맞는 감정의 반응이었다. 서툰 해석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증거였고, 내가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왔는지를 보여주는 삶의 조각이었다.
예전에는 “모든 것은 지나간다”라는 문장을 단순히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라는 위로로 해석했다. 하지만 어느 날 큰 상실을 겪고 난 후 그 문장을 다시 보니, ‘지나가지만 흔적은 남는다’라는 또 다른 진실이 읽혔다. 처음의 해석이 틀린 게 아니라, 이제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게 된 것뿐이었다. 서툰 해석이 없었다면, 그 문장을 두고 내가 얼마나 자라났는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정확할 수 없지만, 그 불완전함 덕분에 문장이 나를 따라 성장해 준다.
2. 감정이 문장을 흔들 때
감정은 해석을 만든다. 같은 문장도 내 마음의 날씨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슬픈 날엔 희망의 문장이 공허하게 느껴지고, 기쁜 날엔 그 문장이 따뜻한 응원처럼 다가온다. 고요한 마음으로 읽으면 고요한 뜻이 보이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읽으면 문장조차 흔들린다. 문장은 종이에 고정돼 있지만, 그 뜻은 읽는 사람의 마음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문장을 사랑의 말로 기억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별의 말로 남겨 두기도 한다. 같은 문장을 두고 ‘왜곡’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지만, 어쩌면 왜곡이 아니라 ‘삶이 만든 해석’ 일지도 모른다.
나는 예전에도 문장을 자주 모아뒀다. SNS에서 건진 누군가의 말, 책 구석에 적힌 짧은 문장들, 때론 영화 자막에서 만난 대사 한 줄. 그중 “너는 너만의 속도로 가면 돼”라는 문장이 있었다. 처음 그 문장을 본 건, 무언가를 이룬 사람들의 성취가 유난히 눈부시게 보이던 시기였다. 나는 느리게 걷고 있는 나를 부끄러워하고 있었고, 그 문장은 나에게 ‘너는 아직도 거기야?’라는 말처럼 들렸다. 속으로는 ‘너무 느리다는 뜻이잖아’라고 되받아쳤고, 결국 그 문장을 위로가 아니라 질책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중에, 마음이 조금 단단해지고 조급함에서 한 발 물러났을 때 다시 그 문장을 읽게 됐다. 그제야 ‘괜찮아, 너는 너대로 가도 돼’라는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그 문장은 그제서야 진짜 제 뜻을 보여준 것 같았다.
우리는 흔히 ‘객관적인 해석’이나 ‘정확한 의미’에 대해 말하지만, 문장은 언제나 감정의 거울을 통해 읽힌다. 그래서 해석이란 건 오히려 개인적인 것이다. 정확한 해석보다 중요한 건, 그 문장이 내 마음에 어떻게 닿았느냐는 점이다. 감정이 만든 해석은 그 시점의 나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것이 아무리 서툴고 어긋났더라도, 그건 내 삶의 한 자락이었다. 그래서 감정적인 해석이야말로 가장 ‘나다운’ 해석일 수도 있다. 해석은 언제나 정답이 아니다. 해석은 곧 내 마음의 모양이고, 그것은 날마다 바뀌는 삶의 흐름을 담고 있다. 결국 문장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문장을 비추는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쌓여, 나는 나를 조금씩 알아간다.
3. 서툰 해석도 결국 나의 삶이다
처음 어떤 문장을 읽었을 때, 그것을 잘못 해석한 건 아닐까 하고 돌아보는 날이 있다. 한참 지나 다시 같은 문장을 봤을 때, ‘왜 그땐 저렇게밖에 이해하지 못했을까’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생각한다. 그 시절의 그 해석도, 그것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문장을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내가 가진 언어와 감정으로 최선을 다해 읽은 것이었다고.
문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구조물이지만, 해석은 살아 있는 유기체에 가깝다. 읽는 이의 시간, 감정, 기억, 고민이 모두 영향을 미친다. 어떤 문장을 보고 눈물이 났던 날이 있었다. 지금 다시 보면 그 문장은 너무 평범해서, 왜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 눈물은 거짓이 아니었다. 당시의 나는 그 문장에서 무언가를 봤고, 그것이 나를 건드렸기에 반응했다. 그 해석이 문장의 본래 의도와 다르다 해도, 그건 나의 진실이었다. 결국 해석은 객관적인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주관적인 삶을 비추는 일이다.
또한 서툰 해석은 그 자체로 기억이 된다. 나는 종종 예전에 써놓았던 문장 노트를 다시 들춰보곤 한다. 그 속에는 지금이라면 쓰지 않을 표현, 지금은 공감하지 않는 감상이 적혀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지우고 싶지는 않다. 그 시절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그 해석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문장을 해석하게 되고, 그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처음엔 ‘이건 무슨 뜻이지?’ 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문장도, 나중에는 ‘이건 지금의 나와 너무 닮았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이 온다.
해석이란 결국 나의 삶을 문장 위에 펼쳐보는 일이다. 서툴렀던 해석도, 다정했던 해석도, 지나쳤던 해석도 모두 내가 걸어온 시간의 흔적이다. 그 흔적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어느새 나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문장을 어떻게 읽었는지가 중요하다기보다, 내가 그때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문장을 해석하는 것은 결국 나를 해석하는 일이니까.
마무리: 해석의 틈에 삶이 스며든다
우리는 문장을 읽으며 살아간다. 때로는 그 의미를 오해하고, 감정에 휩쓸려 서툴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서툰 해석 안에 나의 삶이 있고,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문장은 언제나 그대로지만, 내가 바뀌기에 해석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은 결국 나를 이해하는 여정과 닮아 있다. 서툰 해석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건 내가 진심으로 삶을 통과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는 문장을 읽고, 흔들리고, 다시 써 내려가려 한다. 그것이 바로 나의 언어이고, 나의 삶이다.